의대 증원의 역설, 국제학교는 함정이다
2024년 5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3시, 압구정동의 한 컨설팅 룸. 통유리창 너머로 도산공원의 초록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지만, 테이블 위 공기는 무거웠다. 내 앞에는 단정하게 각을 잡은 샤넬 재킷 차림의 학부모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잠겨버린 자물쇠를 위한 열쇠

2024년 5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3시, 압구정동의 한 컨설팅 룸. 통유리창 너머로 도산공원의 초록이 비현실적으로 선명했지만, 테이블 위 공기는 무거웠다. 내 앞에는 단정하게 각을 잡은 샤넬 재킷 차림의 학부모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A4 용지 위로 밀어 보인 아들의 서류철에는 지난 3년간의 기록이 빼곡했다. SAT 1580점. AP 미적분학 BC, 화학, 생물학 모두 5점. 미국 대학병원 소속 연구실 인턴십 경력 증명서. 그녀는 손끝으로 서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의대 정원이 1,509명이나 늘었으니, 이제 우리 아이에게도 길이 열린 거겠죠?” 그 질문은 희망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1년에 6만 달러가 넘는 국제학교 학비를 감당하며 쌓아 올린 탑이, 드디어 빛을 볼 것이라는 믿음.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그녀의 믿음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숫자의 배신
정부 발표는 명료했다.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4,567명으로, 1,509명 순증한다. 27년 만의 증원. 표면적으로 이것은 모든 수험생에게 돌아가는 파이의 확대를 의미한다. 하지만 파이를 나누는 규칙은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교육 시스템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격과 배제의 논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문화 자본이 어떻게 특정 계층에게만 유리한 ‘게임의 규칙’으로 작동하는지 설파했듯, 이번 증원 역시 새로운 규칙의 선언이다.
핵심은 늘어난 1,509개의 좌석이 어디로 향했는가에 있다. 2024년 5월 30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최종 승인한 ‘2025학년도 대입전형 시행계획’을 해부하면, 돈과 시간을 투자해 ‘글로벌 포트폴리오’를 쌓아온 이들에게 이번 증원은 축복이 아니라 통보다. 전략적 투자가 부실 채권이 되었다는 통보. 증원의 가장 큰 수혜자는 ‘지역인재전형’이다. 비수도권 의대 정원의 60%에 가까운 인원을 해당 지역 출신 학생으로 채우는 이 전형의 선발 인원은 2024학년도 1,025명 수준에서 2025학년도 1,913명으로 888명 늘었다 (정원 내 수시 기준, 대교협 발표). 전체 정원 대비 비중은 40%대에서 60% 가까이 치솟았다. 반면, 해외고 및 국제학교 졸업생이 주로 지원하는 ‘재외국민 특별전형’ 의대 정원은 전국을 모두 합쳐 66석에 불과하다. 2024년과 동일한 숫자다. 새로운 전체 파이 4,567석의 1.4%에 지나지 않는다. 숫자는 냉정하다. 역대급 증원이라는 잔치에 이들은 초대받지 못했다.
무가치해진 자산

이것은 단순한 양적 배분의 문제가 아니다. 게임의 규칙 자체가 바뀌었다. 지난 10여 년간 최상위권 입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글로벌 인재’라는 서사는 그 가치를 급격히 상실했다. 새로운 게임에서 가장 강력한 변수는 두 가지다. 출신 고등학교의 주소지와 수능 점수. SAT 1580점보다 충청남도에서 6년간 거주했다는 주민등록등본이, 명문대 교수와 함께 쓴 소논문보다 400점 만점의 수능 표준점수가 더 강력한 화폐가 됐다. 제도는 비싼 농담이 됐다.
서울 소재 국제학교의 연간 학비는 4,000만 원을 넘고 일부는 6,000만 원에 육박한다 (2024년 기준). 3년이면 1억 2,000만 원에서 1억 8,000만 원에 달하는 투자다. 이 투자는 ‘차별화된 경쟁력’이라는 약속에 대한 프리미엄이었다. 남들이 국어, 영어, 수학 문제집을 풀 때, 내 아이는 세계를 무대로 토론하고 탐구하며 자신만의 포트폴리오를 구축한다는 믿음. 하지만 2025년 한국 의대 입시라는 시장에서, 이 포트폴리오는 더는 우량 자산이 아니다. 거래소에서 상장 폐지된 주식에 가깝다. 이 자산을 현금화할 수 있는 창구는 1.4%의 바늘구멍뿐이다. 시스템은 이들에게 명확한 신호를 보낸다. 당신들이 쌓아 올린 자본은 여기서 통용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 구조가 강요하는 합리적 선택은 무엇인가. 더 뛰어난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사를 가는 것이다. 강남 타워팰리스에 살며 아이를 제주 국제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6년 전 강원도 원주로 이주해 그곳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니는 것이 의대 입학에 수십 배 유리한 전략이 되었다. 프랑스 사회학자 레이몽 부동이 지적했듯, 개인은 언제나 주어진 구조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글로벌 노마드’를 지향했던 교육 모델은 이제 ‘지역 토착화’라는 생존 전략 앞에서 힘을 잃는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세계적인 길을 택했던 이들이 가장 폐쇄적인 지역 할당제의 벽에 가장 먼저 부딪혔다.
닫힌 문 앞에서
이 현상을 단지 입시 제도의 기술적 조정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것은 국가가 ‘엘리트’를 선별하고 통제하는 방식의 전환을 예고한다. 국가의 통제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수능과 지역 할당제라는 두 축을 강화함으로써, 해외 학력이나 초국적 네트워크 같은 외부 변수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다. ‘지역 의료 불균형 해소’라는 대의명분 아래, 엘리트 재생산의 경로를 국가의 관리 감독 아래 두려는 구조적 재편이다. 개인의 선택이라고 믿었던 자녀의 교육 루트가 사실은 거대한 시스템의 손바닥 안에서 어떻게 재정의되고 무력화되는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다시 2024년 5월의 컨설팅 룸. 나는 테이블 위 서류철을 조용히 그녀 쪽으로 밀어주었다. 하얀 조명 아래서 유독 반짝이던 SAT 1580점이라는 숫자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 서류철은 더 이상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었다. 이미 자물쇠가 바뀌어 버린,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발견된 과거의 유물이었다. 그녀는 말없이 서류철을 가방에 넣었다. 짤깍, 하고 가방 덮개가 닫히는 소리가 그날 오후의 유일한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