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AI 에이전트로 키워라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10시 42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의 한 스터디 카페 4번 좌석. 중학교 2학년생 최지훈(가명) 군이 12.9인치 아이패드 화면 위에 애플 펜슬을 굴리고 있다. 화면 속에는 챗GPT(ChatGPT) 대화창이 떠 있다. 아이는 수행평가를 위해 '기후 위기가 한국 농업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프롬프트를 입력 중이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초점이 흐리다. 모델이 내놓는 유려한 문장들을 복사해 워드 문서로 옮기는 손길은 기계적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지능의 파도 위에서 아이는 항해사


2024년 10월 28일 월요일 오후 10시 42분.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의 한 스터디 카페 4번 좌석. 중학교 2학년생 최지훈(가명) 군이 12.9인치 아이패드 화면 위에 애플 펜슬을 굴리고 있다. 화면 속에는 챗GPT(ChatGPT) 대화창이 떠 있다. 아이는 수행평가를 위해 '기후 위기가 한국 농업에 미치는 영향'을 묻는 프롬프트를 입력 중이다. 하지만 아이의 눈은 초점이 흐리다. 모델이 내놓는 유려한 문장들을 복사해 워드 문서로 옮기는 손길은 기계적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거대한 지능의 파도 위에서 아이는 항해사가 아니라, 그저 구명보트에 몸을 맡긴 채 표류하는 승객에 가깝다. 부모는 아이가 'AI를 잘 활용하고 있다'고 믿으며 월 150만 원의 컨설팅 비용을 지불하지만, 정작 그 현장에서 목격되는 것은 지능의 확장이 아닌 자아의 외주화다.
시장은 언제나 불안을 먹고 자란다. 2023년 10월 1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8 대입제도 개편 시안' 이후, 강남과 목동의 학부모 커뮤니티를 지배한 정서는 공포였다. 수능의 변별력이 약화되고 내신이 5등급제로 완화되면서 '비교과'와 '심층 면접'의 비중이 커질 것이라는 분석이 쏟아졌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등장한 새로운 상품이 바로 'AI 리터러시'와 '코딩 역량'이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정보 교과 시수가 2배로 확대된다는 소식은 '코딩 의대반'이라는 기괴한 결합 상품을 만들어냈다.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파이썬(Python)을 가르치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기술을 습득시키려 혈안이다. 지식을 암기하는 대신 도구를 다루는 법을 배우면 미래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이것은 전략적 오판이다. 도구의 숙련도는 지능의 본질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AI를 어떻게 부릴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AI처럼 주도적으로 사고할 것인가'로 옮겨가야 한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논의되는 에이전틱 AI(Agentic AI)의 핵심은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실행 계획을 세우며, 결과에 따라 경로를 수정하는 자율성이다. 세종대학교 구영현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차세대 지능의 승부처는 단순한 계산 능력이 아니라 '에이전틱 역량(Agentic Capability)'에 있다.
교육의 관점에서 에이전틱 역량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십 년간 '자기주도 학습'이라 불러온 가치의 현대적 변용이다. 하지만 기존의 자기주도 학습이 성적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자기 통제'에 집중했다면, 에이전트적 인간은 문제 자체를 정의하고 자원을 배분하는 '운영체제(OS)적 사고'를 지향한다. 인적 자본 이론의 대가 게리 베커(Gary Becker)의 논리를 빌리자면, 미래 가치는 특정 기술(Specific skill)의 습득이 아니라 지능적 자원을 통합 관리하는 일반 역량(General capability)에서 발생한다. 아이를 유능한 조종사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이 자체가 스스로를 최적화하는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서울의 입시 생태계는 여전히 이 변화를 거부한다. 2024년 대치동 초등 의대관 대기자가 3,412명에 달한다는 수치는 한국 교육이 여전히 '정답 찾기'라는 폐쇄적 루프에 갇혀 있음을 증명한다. 학원은 아이들에게 AI가 내놓은 답을 검토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왜 이 답이 필요한가'를 묻는 힘은 길러주지 않는다. 보드리아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세상처럼, 아이들은 실제 지식이 아닌 지식의 복제물(AI 생성물)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자로 전락하고 있다.
진정한 격차는 여기서 발생한다. 에이전트적 역량을 갖춘 아이는 AI를 도구가 아닌 자신의 확장된 신경계로 인식한다. 이들은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필요한 AI 에이전트들을 소환하여 협업하며, 최종적인 의사결정의 책임을 진다. 반면 기술적 숙련도에만 매몰된 아이들은 AI가 설계한 논리 구조 안에서만 움직이는 부품이 된다. 전자가 시스템의 설계자라면, 후자는 시스템의 유지보수 인력이다.
제도는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학교생활기록부의 기재 금지 사항이 늘어나고 서류 블라인드 평가가 강화될수록, 대학이 찾고자 하는 것은 '만들어진 스펙'이 아니라 학생 개인의 '고유한 탐구 궤적'이다. 2028학년도 대입부터 전면 도입되는 논, 서술형 평가는 텍스트를 생성하는 능력을 넘어, 논리적 선후 관계를 스스로 구축하는 에이전트적 사고력을 요구할 것이다. 교육의 본질이 '전수'에서 '구축'으로 이동하고 있다.
다시 대치동의 스터디 카페로 돌아간다. 오후 11시, 학원 버스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점령한다. 아이들은 쏟아져 나오고, 부모들은 운전석에서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이 풍경 속에서 우리가 자녀에게 이식하려 노력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신 버전의 앱(교과 지식)을 설치하는 데 급급해 정작 기기 자체의 성능을 좌우하는 운영체제(에이전트 역량)의 노후화를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능이 공기처럼 흔해진 시대에 인간의 탁월함은 '아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의도하는 것'에서 온다. 스스로 목표를 향해 움직이지 않는 인간은 아무리 고성능의 AI를 손에 쥐어도 그저 잘 훈련된 승객일 뿐이다. 자녀의 손에 최신형 내비게이션을 쥐여주기 전에, 그가 스스로 핸들을 쥐고 목적지를 결정할 의지가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 에이전트의 시대, 가장 위험한 인재는 시키는 일만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이다. 지능은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